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德川家康)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남긴 말이다.
이에야스 일대기가 예전에는 '대망'이란 이름으로 천만부 이상 책이 팔렸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있는 중국의 삼국지 같은 소설이다.
일본역사를 이해하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이
주요 인물이다. 세 사람을 일본 역사의 3대 영웅이라 부른다.
비교적 한국역사와 친숙한 인물이다.
일본에는 15세기 말부터 약 100년 동안 계속된 전국시대가 있었다.
전국에서 300여명에 이르는 군웅이 할거하여 각축을 벌이던 난세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절한 투쟁의 와중에 도태되어서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가까스로 천하 제패 기회를 차지한 무장들은 겨우 6~7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중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차례로 천하를 움켜 잡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독특한 방법으로 최종 통치자가 되었다.
이 세 인물은 생김새도 성품도 저마다 아주 다른데
노부나가가 떡을 쳤다면 히데요시가 떡을 빚어내고
이에야스가 그 떡을 먹었다고 비교를 한다.
또한 여건변화와 상황인식을 두견새에 비유한다면
노부나가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죽여 버려라
히데요시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하라
이에야스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고 표현한다.
노부나가는 매사에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일을 벌리는 반면에
히데요시는 사람들이 뜻을 알듯 모를듯하게 감추는 데 있고
이에야스는 사람의 마음속을 미리 헤아려 미끼를 갖춘다.
기독교를 보호한 노부나가, 금교(禁敎)와 무역을 동시에 추구한 히데요시,
반면에 이에야스는 금교와 무역을 같이 제한하는 특징을 각자 보여 준다.
저마다 독자적인 기질로 세 사람은 릴레이식으로 바톤을 이어받아
천하를 장악했으나, 그 중에서도 뛰어난 현실 적응력과
끈질긴 인내심을 발휘한 이에야스가 가장 돋보인다.
최후 승자 이에야스는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시대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아니다. 남이 견디지 못할 일을
참고 인내하며, 남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에 과감히 투신한 결단,
고난과 위기 속에서 배양된 지혜, 이것이 바로 승자의 조건이었다.
현대 경영의 귀재라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산하에 이에야스를
연구하는 부서를 설치했다는 점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금 우리는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가 방향을 잃고 경제가 난관에 처해 있으며 사회가 혼미하다.
난세를 이겨낸 이에야스의 삶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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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인질로 출발한 생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지금의 아이치 현(愛知縣) 지방인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떠돌이 승려이던 도쿠아미(德阿彌)다.
지방 토호로 출발한 마쓰다이라 가문은 전국의 풍운에 편승해
차차 인근 지방을 공략하여 영지를 넓혀갔다.
그러다 7대째에 이르러 오카자키 성을 본거지로 하여 미카와 일대를
거의 장악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확장은 불가능했다.
동쪽에 있는 이마가와(今川), 서쪽에 있는 오다(織田) 양대세력으로부터
잇따라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존립마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今川) 밑에 들어갔다.
마쓰다이라의 영지 보존을 약속받는 대가로 그의 아들인 이에야스를 인질로 보내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질 생활은 처음부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야스를 호송하던 이마가와의 가신이 돈에 매수되어 이에야스를
오다 쪽에 넘기고 만 것이다.
오다 쪽에서는 마쓰다이라에게 사자를 보내 이마가와와 관계를 끊지 않으면
이에야스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마쓰다이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마가와와 맺은 우의를 배신한다면,
미카와 무사로서 체면이 서지 않으니, 이에야스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다행히 오다 쪽은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고 연금했다.
그러다가 오다는 이에야스를 이마가와에게 포로 맞교환용으로 인질을 되 팔았다.
얼마 후 이에야스는 다시 이마가와의 거성인 슨푸(駿府)로 끌려가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마쓰다이라 가문은 풍지박산이 나고 이에야스의 아버지는
의문스런 변사를 당한다. 이에야스는 가문의 정통을 승계 받았으나
여전히 인질 신분이였다.
그는 이마가와의 노예였다. 그와 그의 가신들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예외없이 가장 위험한 최일선에 투입되어 사투를 강요받았다.
요컨대 그들은 이마가와 군의 외인부대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그들은 용감했다.
비록 인질이기는 하나 가능한 한 자신의 강인함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살아 남아서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반드시 때가 온다고 믿었다.
14년에 걸친 인질 생활은 그에게 놀라운 인내력과 강인,용기,검소,침착,신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이 모든 것을 소년기의 인질생활을 통해 철저히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절의 이에야스는 반드시 불운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제2부 이마가와의 사망과 노부가나의 등장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치욕스러운 인질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오카자키에 남아 있는 가신들 역시 말할 수 없는 인종과 고통을 강요받고 있었다.
오카자키 성에서 산출되는 쌀은 이마가와 수중으로 모조리 슨푸로 실어갔다.
그러므로 주군이 없는 땅에 사는 오카자키의 가신들에게 녹봉이 지급될 리 없었다.
가신들은 신분이 다른 농민과 마찬가지로 괭이와 호미를 들고 땅을 파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이들은 오카자키 성에 진주해 온 이마가와의 가신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고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전국시대의 무사는 거취의 자유, 주군을 택할 권리를 폭넓게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가신들도 전국의 무사니만큼 궁핍과 굴욕을 참지 못해
새로운 주군을 찾아나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결속하여 주군의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충절을 다했다.
바로 이 점에 미카와 무사의 특이성이 있다.
이에야스는 이들을 미카와의 ‘후다이(譜代)’라 불렀다. 즉 대를 이어
마쓰다이라 가문을 섬겨온 가신을 뜻한다.
그들은 전국시대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결집력과 충성심이 강했다.
성묘를 끝내고 슨푸로 돌아온 이에야스는 이듬해 1월 슨푸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義元)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이 결혼에는 이마가와의 속셈이 깊이 작용했다.
즉 이에야스를 일족의 여자와 결혼시킴으로써 마쓰다이라 가문을
이마가와 가문에 동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 해 5월 이마가와는 숙원이던 전국패권 장악을 위해 교토를 향해 대군을 동원했다.
이때 그는 그 길목인 오와리 지방의 오다 군을 공격하기로 하고 이에야스를 불렀다.
이에야스에게는 당연히 위험한 선봉을 맡겼다.
이에야스가 오다의 영내 깊숙이 진입하여 오타카 성채를 함락한 것은 19일 아침.
이어 그날 중으로 가까이 있는 오타카(大高) 성에 들어가 이마가와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명령이 도착하지 않았다.
구쓰카케 지방에서 오타카로 향하던 이마가와 군단의 주력부대가 산속에
접어들었을 때 오다 노부나가 군대가 역습으로 기습공격을 해 왔다.
미처 손 쓰볼 겨를도 없이 이마가와는 사살되었다.
불과 4000명의 병력으로 1만 5000의 대군에 쾌승을 거둔 이 역사적인 전투로
27세의 오다 노부나가는 순식간에 그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이 전투를 발판으로 하여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 패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이 전투를 전환기로 삼아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 또 다른 사나이가
바로 19세의 청년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에게 이마가와 군이 대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이튿날 저녁이었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욱 당황한 것은 가신들이었다.
가신들은 이러한 의견을 올렸다.
“머뭇거리고 있으면 이 성도 위험합니다. 속히 군사를 정비하여
오카자키로 돌아가야 합니다. 패전이 확실한 이상 이런 전초 기지를 지킨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그러나 이에야스는 고개를 저었다.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싸움터에는 유언비어가 따르기 마련,
이것은 혹시 적의 모략인지도 모른다.
교란전술에 휘말려 성을 버리고 도망한다면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된다”
그의 조심성은 오카자키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그는 성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의 다이주(大樹) 사에 진을 쳤다.
“우지사네(氏眞) 공의 지시가 없는 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우지사네는 이마가와 의 아들이다.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19세 청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이고 조심성이었다.
제3부 배신과 독립
이마가와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지만
이에야스는 곧바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마가와 군이 도주한 뒤 미카와의 최전선을 홀로 지키며,
이마가와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복수전을 벌여야 한다며
오다 쪽의 성채를 닥치는 대로 점령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까지 공격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에야스의 신의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미카와에 있는 오다의 영지를 빼앗아
원 가문인 마쓰다이라의 영지를 확장하는 것이 내심이었다.
다행히 노부나가는 오와리 수비에 급급하여
미카와에서 구축한 이에야스의 작은 성들에는 관심이 적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더욱 확장하기 쉬웠다.
이마가와가 죽었다고는 해도 그의 위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빈틈없이 슨푸의 동정을 염탐했다.
그 결과 우지사네가 전의를 상실하고 주색으로 날을 보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야스는 기회가 왔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노부나가가 이에야스에게 동맹을 제의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원래 신중한 이에야스였으나 이때처럼 결단을 내린 적도 드물었다.
자칫 잘못하면 모처럼 손에 넣게 된 미카와 전토를 잃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까지도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마가와의 우산 밑에
그대로 있을 것인가.
가신들은 대부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했다.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 이마가와가 훨씬 더 강대하다는 것,
이에야스의 부인이 이마가와 혈족이라는 것,
많은 가신들의 처자가 아직 슨푸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하는 이유가 많았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우지사네보다 노부나가의 기량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의리도 존중하지만 어디까지나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은밀히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종전대로 이마가와의 충실한 수족인 양 행동했다.
그리고 1563년 봄에 별안간 이마가와 쪽의 우에사토 성을 공격해 함락했다.
이때서야 우지사네는 속은 것을 알고 격분해
이에야스 부인의 아버지(장인)에게 자결을 명하고 인질로 남아 있던
이에야스 가신의 처자들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 신경질적인 보복이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단교를 선언하고 복수전을 펼 구상하게 되었다.
제 4부 내부 단속
독립을 쟁취한 이에야스에게 가장 먼저 닥친 시련은
1563년 가을에 발발한 광신적인 불교 종단 잇코슈(一向宗)의 폭동이었다.
이 폭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에야스가 그들의 총본산인 조쿠(上宮) 사에 대해
과다한 식량을 징발했기 때문이었다.
잇코슈 신도들은 영주 못지 않은 조직과 군비를 갖고 있었다.
또 구원을 믿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단을 수호하겠다는 각오가 투철했다.
잇코슈의 폭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이 폭동은 통상적인 전투와는 달랐다.
연일 각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므로 이에야스 측의 병력 소모가 많았다.
이에야스도 직접 창을 들고 싸워야 하는 긴박한 사태에 몰리기도 했다
한번은 폭도의 총탄을 맞은 것도 모르고 난전(戰)을 벌이다가
오카자기 성에 돌아와 갑옷을 벗었을 때 탄환 두 알이 땅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이에야스를 더욱 괴롭힌 것은 가신들 중에도 잇코슈 교도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가신들은 이런 혈투 중에도 이에야스에게만은 창을 겨누지 않았다.
그들은 이에야스를 만나면 도주했다.
처절하기 짝이 없던 잇코슈의 폭동도 이듬해 2월,
6개월만에 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무사들의 영지는 몰수되지 않았고,
사찰과 승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폭동 주모자를 처단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이에야스가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애당초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 조건이란 폭동 진압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지킨 것이 있다면 첫째 조항 정도였다. 자기에게 칼을 겨눈 가신이지만 관대하게 회유했다.
반란 세력을 해체시킨 후 이에야스는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갑자기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와 신도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조쿠 사에 대해 쌀을 과다하게 징수한 것은 이에야스가 일부러 도발한 것이라고 한다.
첫째 목적은 잇코슈와 그 신도의 일소에 있었다.
그러나 이 도발을 통해 영내에 잠재하는 반대 세력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과연 그때까지 지하에 숨어 이마가와 쪽과 내통하던 토호와 반대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제 5부 유일한 패전
이에야스는 잇코슈들을 소탕하고 동부 미카와로 군사를 보내 그들의 거점인
요시다(吉田) 성을 점령함으로써 미카와 전체를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미카와 통일은 대대로 품어온 염원이었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도발과 회유 양면작전으로 불과 4년 만에 달성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565년,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정3품 미카와노카미(三河守)라는 벼슬을 받고,
당당히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올랐다.
미카와에 기반을 다진 이에야스의 다음 목표는 이마가와의 비옥한 영지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최강인 고슈(甲州) 군단을 거느리고 있던
북부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역시 이 이마가와의 영지를 노리고 있었다.
신겐은 교토 부근을 장악한 노부나가에게 대항하여 교토 진입을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이에야스와 신겐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에 양군 사이에는 스루가(駿河)와 도토우미, 미카와 북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다가 1572년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이해 12월에 신겐은 4만 3000의 대군을 이끌고 도토우미에 침공하여
후다마타 성과 요시노 성을 함락하고 하마마쓰 북쪽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에 진을 쳤다.
이때 하마마쓰에는 노부나가의 원병 3000 명이 도착해 있었으나
이들을 합해도 이에야스는 군은 8000명에 불과했다.
작전회의에서 장수들은 이러한 전력의 차이를 이유로 항의하자고 주장했다.
원군으로 온 장수들도 신겐이 비록 싸움을 도발한다고 해도
결코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신중하던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강경히 출격을 명했다.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는 30세 청년의 혈기였다.
이에야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신겐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것은 병력을 횡렬로 전개시키는 대형으로 원래는 적보다 몇 배나 우세할 때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진형이다.
신겐은 이에야스의 포진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
이것은 물고기 비늘을 겹친 것 같은 종대로, 진형 중앙부가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돌출해 있다.
공교롭게도 이 대형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에 맞서 결사적인 돌격을 감행할 때 쓰는 전법이다.
22일 오후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우익의 원군(이에야스를 지원하러 온 노부나가의 군)이 무너졌다.
이것을 본 신겐은 제2선, 제3선의 병력을 중앙과 측면에서 투입했다.
신겐의 전법은 노도와 같은 인해전술로 시작된다.
창과 칼로 무장한 보병대가 공격을 감행한 뒤 기마대가 돌격하여 적을 짓밟는 것이다.
결과는 이에야스 군의 처참한 패배였다.
이 싸움에서 이에야스 군은 1200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하마마쓰 성으로 퇴각했다. 이에야스의 전생애를 통해 유일한 패배였다.
성으로 돌아온 그는 사방에 횃불을 밝히고 성문을 활짝 열어놓게 했다.
패주해 오는 아군을 맞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추격하던 적은 또 무슨 계략이 있는 줄 알고, 부근에 불만 지르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에야스는 대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밤 소총대를 조직해
신겐의 진지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적군의 기세가 올라 또 다시 공격해올 것에 대비한 독특한 전술이였다.
여기에서도 집요한 이에야스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제6부 새로운 책략과 전법
이 전투가 끝난 뒤 신겐은, 이듬해 4월 병을 얻어 진중에서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천명이었으나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에게는 그 이상의 낭보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가쓰요리(勝賴)와 대결했다.
신겐이 죽은 뒤 이에야스는 신겐의 전법을 본떠 계속 스루가를 공격했다.
그러는 한편 그 가신들을 포섭하여 내응을 얻어,
신겐 군의 중요 거점인 나가시노(長篠) 성을 함락했다.
이에 맞서 가쓰요리도 이에야스의 진영 깊숙이 첩자를 들여보냈다.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가 요시로(大賀彌四郞)를 매수하여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築山) 부인과 밀통하게 하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내응하도록 했다.
쓰키야마 부인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인질로 있을 때 혼인한 이마가와의 조카딸로,
그녀는 삼촌을 죽인 노부나가와 가문을 멸망시킨 이에야스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모는 미연에 발각되어 요시로는 극형을 당했다.
가쓰요리가 1만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미카와에 침입한 것은 1575년 4월이었다.
그는 요시로의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500의 병력밖에 없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함락 직전에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3만 8000이 달려와
성의 서남쪽 시타라가하라(設樂原)에 포진했다.
가쓰요리 군의 장수들은 우선 나가시노 성을 점령하고 여기서 지구전을 벌이자고 헌책했으나,
가쓰요리는 일축했다.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기 위해 약간의 군사만 남기고,
시타라가하라에 전군을 진출시켰다. 가쓰요리 군의 전법은 여전히 인해전술이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 연합군은 지난번 패배를 거울 삼아 새로운 전법을 개발해 놓았었다.
즉 진지 전면에 호를 파고 2중 3중으로 대나무 울타리를 세워 기마대의 공격을 차단하며,
보병에 대해서는 총포대로 맞선다는 새로운 전법이었다.
21일 새벽 가쓰요리 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돌격대가 울타리에 막혀 우왕좌왕할 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의 3000 총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하여 도주하는 가쓰요리 군은 연합군의 기마대가 유린했다. 그 결과
가쓰요리 군은 패전을 하고 용장들을 거의 잃어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 전투에 등장한 방책과 총포대를 이용한 새로운 전법은 노부나가가 창안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앞서 뼈아픈 패전을 경험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강력히 헌책하여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똑같은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는 이에야스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
나가시노 전투였다.
이 전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총포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7부 놀라운 결단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은 2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쌍방이 서로를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은 아니다.
이용가치가 있었을 뿐, 그런 요소가 없어지면 이 동맹은 무의미해진다.
나가시노 전투를 통해 일본의 전술을 일변시킨 노부나가의 명성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패권자(覇者)라는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도 나날이 관록을 더해 ‘천하 제일의 명장’이라는 평판까지 듣게 되었다.
천하의 주인은 두 사람일 수 없다.
여기서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충성도를 시험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信康)에게 출가시킨 자기 딸 도쿠히메가 보낸 서신을 이용했다.
즉 ‘시어머니 쓰키야마 부인이 우리 부부를 이간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남편 노부야스에게 소실을 들이게 했다. 쓰키야마 부인 자신은 다케다 쪽의 첩자와 정을 통하고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여기에 노부야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또 노부야스는 황음(荒淫)을 일삼고 내가 데려온 시녀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등등….
노부나가는 이런 죄상을 이에야스에게 통보하고 모자의 처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결코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싸움터를 누비며 무장으로서 역량을 발휘해온 아들 노부야스를
앞으로 이에야스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기량을 지녔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노부나가가 들이댄 문제는 노부야스의 기량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컨대 노부나가를 택하느냐 노부야스를 택하느냐의 문제다.
다른 방법을 택할 여지는 없었다.
'어쩌면 모자를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자를 구해낸다고 해도
지금까지와 같은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굳은 결속은 보장받을 수 없다.
노부나가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틀림없이 동맹자로서 이에야스에게 한계를 느끼고 이반을 획책할 것이다.’
이에야스 생애 중에서 이때처럼 고뇌하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는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또 생각했다.
사흘이 지난 후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노부나가는 지금 내게 불신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동맹의 앞날을 점치기 위해 큰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내가 이 희생을 치르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는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노부나가와 우리의 동맹은 가문의 존망을 좌우한다.
그러니 나는 노부나가를 택하고 노부야스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비정한 길을 선택했다.
결국 쓰키야마 부인을 1579년 8월29일에 처형하고,
며칠 후 노부야스에게는 할복을 명했다.
이에야스의 처자 살해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유지해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한,
피나는 결정이었다.
이로써 이에야스에 대한 노부나가의 신뢰는 더욱 깊어져,
이에야스는 대망을 향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제8부 동맹자의 죽음
1581년 끊임없이 변경을 위협하던 다카텐신(高天神) 성을 공략하여
도토우미 일대를 평정한 이에야스는 그 이듬해 3만 5000의 대군을 거느리고
가쓰요리의 다케다 본부로 공격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다케다 군단도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납으로 원성이 높았으며 가신들도 크게 동요하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이를 아는 이에야스는 진격에 앞서 밀사를 보내 회유와 포섭을 시도했다.
그 결과 스루가의 주요 요새지의 성을 아무 저항도 없이 점령하게 되었다.
가쓰요리는 도주를 거듭하다, 이듬해 3월 자기를 따르던 33명의 가신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다케다 가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고 스루가를 그의 영지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미카와, 도토우미와 함께 스루가를 영유하여
일약 70여 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성장했다.
이에야스는 1582년 정월, 답례를 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거성인 아즈치(安土)로 방문했다.
노부나가는 20여 년 동안 충실한 이 동맹자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며칠 동안 향연을 베풀고 교토, 오사카, 나라, 사카이(堺) 등지를 유람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코쿠(中國)의 모리(毛利) 일족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장군 '히데요시' 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교토로 올라갔다.
이에야스가 유람을 마치고 작별을 고하기 위해 교토로 향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6월2일 새벽, 교토의 혼노(本能)사에서
노부나가가 충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기습공격을 받아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반란에 대한 급보를 받은 이에야스는 망연자실했다.
처자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온 20여 년의 맹약이 휴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영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불과 10여 명의 수행원이 있을 뿐이다.
당장 복수전에 나설 수도 없다.
잇따라 들어오는 보고에 따르면 미쓰히데의 반란 소식을 듣고
폭도로 변한 실직 무사와 토착민들이 혼란을 틈타 마구 살육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제9부 히데요시의 등장
이에야스는 질주를 했다. 미카와로 가는 최단 코스인 이가(伊賀)를 지나
사건 이틀 후에 오카자키 성에 도착하여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열흘 뒤인 14일에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카자키 성을 출발했다.
가장 먼저 반역자 미쓰히데를 사살하는 자가 앞으로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으로 유리해진다.
이에야스는 서둘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한발 늦었다.
6월 19일 그가 나루미에 이르렀을 때, 이미 장군 히데요시의 사자가 먼저 도착했다.
“다카마쓰에서 모리 일족과 대치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질풍처럼 군사를 되돌려
6월13일 미쓰히데 군을 야마자키에서 섬멸하고 이미 교토 방면을 평정했다”고
사자는 통보했다. 이는 이에야스가 군사를 일으키기 하루 전이었다.
만약 이에야스가 향연에 참석치 않고 자기 영지에 있었다면,
미쓰히데를 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먼저 왔을지도 모른다.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를, 하필이면 멀리 쿄토에 있었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에야스는 대권을 히데요시에게 양보하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군사를 돌렸다.
그리고 이미 군사가 비상체제에 있는 것을 기회 삼아 자기 영지 확장을 서둘렀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그의 영지인 가이를 호조가 넘보자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워 점령하고, 다시 시나노(信濃)를 병합하여 5개 주,
138만 석에 달하는 판도를 가진 큰 다이묘로 성장했다.
여기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 4000이나 되었다.
만약에 노부나가의 장군 히데요시가 서부 일본을 제압한다면
이에야스는 동부 일본의 패권을 잡겠다는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동부에서 5개 영지의 경영에 부심하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중앙 무대에서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쓰히데를 토벌한 지 보름도 지나기 전에 히데요시는
중신들을 오와리의 기요스(淸州)로 소집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선출했다.
이 자리에는 히데요시를 비롯한 시바타 가쓰이에(紫田勝家),
다키가와 카즈마스(瀧川一益),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등 중신과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雄), 삼남인 노부타카(信孝) 등이 출석했으나,
이에야스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동맹자이기는 했으나 가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좌장격인 가쓰이에는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에 반대했다.
그는 혼노 사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장남 노부타다(信忠)의 어린 아들
노부히데(信秀)를 천거하여 출석자의 의견을 물었다.
장손을 후계자로 옹립해야 도리에 맞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히데요시의 주장이 채택돼 노부히데가 후계자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회의에 앞서 쓰네오키 등을 회유해 자기 편에 가담케 했기 때문이다.
후계자 결정에서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오다 노부나가 정권의 계승자란 지위를 확보한
히데요시는 그해 12월 돌연 기후(岐阜) 성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의 항복을 받아, 반대 세력의 결집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시즈케다케(賤岳)에서 카쓰이에를 죽였다.
이때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는 가쓰이에와 호응하여 다시 반기를 들었으나
패하여 할복을 명령받았다.
이어서 히데요시는 그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보다 큰 오사카 성을 짓고,
인근 30여 영지의 다이묘들을 모아 충성을 맹세토록 했다.
이때 히데요시의 영지는 24개 주, 620만 석에 이르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15만 7000에 달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첫째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오다 가문의 실질적인 계승자인 노부카쓰이고,
둘째는 20여 년에 걸쳐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동부의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가 볼 때 범용하고 경박한 노부카쓰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은연중에 실력을 쌓아나가는 이에야스는 방심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대결하지 않으면 안될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
천재적인 모략가 히데요시는 눈엣가시인 이에야스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조정에 주청하여 ‘정3품 참의(參議)’라는 위계를 그에게 내리도록 했다.
히데요시보다 높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실리주의자인 이에야스에게는 이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한 치의 땅만도 못한 그 따위 벼슬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회유에 실패한 히데요시가 이번에는 노부카쓰 주변에 모략의 손을 뻗었다.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소심한 노부카쓰는 그 소문을 믿고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도 이를 도전으로 간주하여 드디어 출병을 명하였다.
제10부 용과 호랑이의 대결
전투는 그달 중순 히데요시 쪽의 장군 쓰네오키가 오와리의 이누야마(犬山) 성을
점령함으로써 불이 당겨졌다. 그때 이세(伊勢)로 향하려던 이에야스는 방침을 바꾸어
나고야 북방의 평야에 혹처럼 돌출해 있는 고마키(小牧) 산에 포진했다.
그리고 적의 전진기지인 하구로(羽黑)를 급습하여 적을 쫓아냈다.
히데요시는 하구로의 패보에 접하자 직접 대군을 이끌고 이누야마 성으로 달려와
고마키에 대항하기 위해 각처에 요새를 구축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히데요시 군의 10만에 대해 이에야스 군은 1만 8000에 불과했으나 지리상의 이점이 있었다.
또 주변 백성이 게릴라가 되어 첩보원 노릇을 했기 때문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양군은 반 달 동안이나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야전의 쌍벽’이라 불리는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인지라 상대의 전술을 다 알고 있어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장수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교착상대를 타개해,
공을 세우려고 초조해 하는 자가 있었다. 쓰네오키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에야스를 고마키에 못박아두고, 그 사이에 미카와를 공격한다.
배후를 찔린 이에야스가 당황하여 철수하면 남아 있는 노부카쓰를 공격해 오와리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작전이었다. 히데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이 집요하게 주장하고,
더구나 그의 조카인 미요시 노부요시 마저 자기가 이 작전을 총지휘하겠다고 나섰다.
히데요시는 할 수 없이 신속한 요격행동을 취하라는 단서를 붙여 이를 허가했다.
4월6일 밤 쓰네오키를 선봉으로 한 1만6000의 요격대가 어둠을 뚫고 진격했다.
이들은 아무 충돌 없이 9일 새벽 후지시마(藤島) 부근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이에야스의 이와자키(岩崎) 성이 있었다.
성병(城兵)은 300도 안 되는 소수였으나 그들은 용감히 대군에 도전했다.
쓰네오키는 이런 작은 산성 따위는 처음부터 묵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유탄이 그의 말에 명중하여 쓰러졌다. 쓰네오키는 분개하여 이성을 잃었다.
그는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말고 신속히 행동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잊고
전군에 이와사키 성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선봉이 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제2대, 제3대, 제4대는 전진이 차단되어
각각 후방에 주둔, 전황을 살피게 되었다.
한편 이에야스 군은 사방에 내보낸 첩자로부터 유격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가 직접 1만의 군사를 지휘하여 4500의 미즈노 타다시게 군과 함께
새벽에 급습을 했다.
쓰네오키가 이와자키 성 공격에 골몰하고 잠시 방심하고 있을 때
이에야스 군이 돌입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쓰네오키가 군사를 돌려 나가쿠테 분지로 진격했다. 이에 매복하고 있던
이에야스의 본진이 측면으로 공격해 오자 대번에 무너지고 쓰네오키는 전사했다.
히데요시에게 패보가 전해진 것은 그날 정오 무렵이었다.
제11부 강화의 조건
나가쿠테의 패전 후 히데요시는 더욱 신중해져 5월에 접어들자
드디어 전군을 미노로 철수시켰다.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전면공격을 피한 것은 과연 히데요시다운 노련함이었다.
그는 기후, 오가키(大垣) 등으로 전진하면서 노부카쓰의 성을 연쇄적으로 공격했다.
마치 나가쿠테의 패전을 설욕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이에야스를 유인하기 위한 도발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오와리에서 나오지 않고 자중했다.
히데요시의 유도작전에 말려들까봐 경계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는 드디어 방침을 변경하고 이에야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교묘한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노부카쓰를 회유하여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분개하여 노부카쓰의 경솔함을 나무랐으나 이미 강화를 맺은 다음이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잃고 말았다.
물론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노부카쓰와 강화하는 게 아니라
이에야스와 화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영지로 돌아가자 집요할 정도로 여러 가지 술책을 강구하여
이에야스와 접촉을 시도하며 강화를 요구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친(親) 이에야스 세력을 각개 격파하는 수단을 썼다.
그리하여 1585년에는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엣추(越中)의 사사 나리마사(佐佐成政)의 항복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세력권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후다이 중에서도
최고 원로인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數正)마저 끌어들였다.
카즈마사의 배신은 이에야스 진영에 큰 충격이었다.
내부분열의 조짐이 보이더니 결국 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운
타다시게와 마쓰모토의 성주가 이탈했다.
이에야스는 가신의 결속 강화와 영내 통치의 개선을 통감하고,
즉시 카즈마사가 수비하던 오카자키 성으로 들어가 임전 체제를 폈다.
병력의 동요를 진정시킨 뒤 오와리와 접경 지역에 있는 미카와의 여러 성에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병력을 재배치하고 군법까지 개정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면하의 대치에 먼저 손을 든 것은 히데요시였다.
그는 동부지방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수 없었다.
규슈 평정이라는 대사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규슈에 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에야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규슈를 평정하는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런 때에 양쪽의 조정 사절로 노부카쓰가 이에야스를 찾아왔다.
히데요시는 그를 통해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서 강화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이에야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강화에 응했다. 1586년 정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여전히 완고하게 자기 자세를 견지했다.
화의에는 응했으나 상경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초조했다.
이에야스가 상경하여 신종(臣從)의 예를 올리지 않으면 화의를 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오다의 판도를 상속하여 중앙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라는 존재와 그 향배를 무시한 채로는 천하통일이라는 대사업을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새로운 수단을 강구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 44세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姬)를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의 정실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는 마지막 카드로 늙은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효자로 알려져 있던만큼, 이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라 해도 좋았다.
이렇게 되자 이에야스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간파쿠(關白)란 최고의 벼슬에 오른 히데요시가
이렇게까지 애걸하다시피 하게 만든 것은 이에야스의 무게를 천하에 알리는 것이 된다.
이에야스는 1586년 10월26일, 6만의 군사로 대형을 편성하고 당당히 서쪽으로 향했다.
오사카에서 그를 맞이한 히데요시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직접 마중 나가 이에야스의 손을 잡고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그가 벗어놓은 신을 가지런히 놓는 등 신경을 썼다.
이튿날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 들어가 여러 장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종의 예를 올렸다.
이에야스는 지난 3년간에 걸친 히데요시와의 대결을 깨끗이 청산하고
그의 천하통일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야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대망을 가슴 깊이 숨기고 우선은 한 다이묘로서 히데요시에게 신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크게 만족하고 이듬해 3월 규슈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나서,
불과 5개월 반 만에 규슈 전토를 평정하고 개선했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상경해 히데요시의 개선을 축하했다.
규슈 평정 뒤에는 당연히 동쪽으로 시선이 간다.
하코네(箱根) 너머는 아직 히데요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광대한 처녀지다.
그중에서도 간토 전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 우지나오(氏直) 부자가 가장 강적이었다.
그들은 1582년에 이에야스와 화해하고 이에야스의 둘째 딸을 우지나오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따라서 히데요시가 이 두 강호의 유대에 쐐기를 박지 않을 리 없었다.
제12부 사돈과의 전쟁
호조에게 창을 겨누면 이에야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것은 히데요시로서는 반드시 해야 할 시험이었고 이에야스도 각오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지난해 준공한
오사카의 저택으로 천황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서 여러 다이묘에게
간파쿠(히데요시)의 명령은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물론 이에야스도 참석하여 서명했다. 그러나 호조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사자를 보냈지만 호조는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고 군사를 증강시켰다. 이것은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히데요시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야스가 호조에게 번의(飜意)를 촉구하는 사자와 서신을 보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말로만 번의를 촉구하는 것은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로부터 ‘화평을 위장하고 실은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려고 획책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런 의혹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에 그는 곧바로 상경해 호조 토벌군의 선봉을 자청했다.
스스로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하여 10만의 대군과 300척의 배를 이끌고
호조의 거성이 있는 오다와라(小田原)로 향했다.
오다와라 전투가 벌어진 것은 1590년 7월이었다.
성을 지키는 호조 군은 3만 5000, 이를 포위한 히데요시 군은 무려 30만.
그야말로 들판을 덮고 골짜기를 메운 대접전이었다.
호조 측은 적은 대군이므로 지구전으로 나가면 식량공급이 어려워 자멸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육로와 해로를 충분히 정비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히데요시의
완벽한 수송작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도리어 보급의 어려움은 자신에게 있었다.
히데요시는 주위의 작은 성채를 모두 파괴하여,
본성(本城)과의 연락을 차단하는 ‘말려 죽이기’ 작전을 폈다.
화공이나 수공 등 무리한 전법은 동원하지 않고 적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이 작전은 성공했다.
대규모의 포위작전에 겁을 먹은 호조 군은 갑자기 전의를 상실했다.
그리고 내응하는 자가 속출해 전투가 시작된 지 4개월 만에 성을 열고 항복했다.
제13부 정치가로 변신
이에야스에게 포상금으로 주어진 것은 호조의 옛 영지인 간토의 6개 지방이었다.
그 대신 지금까지 피땀을 흘려가며 다져온 미카와는 안타깝게도 환수되었다.
비록 영지는 늘어났으나 옛날 황금 영지에 비해 미개간 황무지가 훨씬 많았다.
더구나 하코네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간토로 내려가면 교토로 가는 길이 멀어진다.
상경 희망과 전국제패의 꿈이 사라지는 것이다.
가신들의 불만은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태연했다.
“그다지 비관할 것 없다. 옛 영지보다 훨씬 더 광대해졌다.
사람이 하는 일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때가 되면 언젠가는 상경할 날이 올 것이다. 참고 기다려라.”
히데요시에 대한 절대복종이란 성의를 보이면서도
마음속 깊이 간직한 불굴의 기백이 이 말 속에 숨어 있었다.
그의 특징은 일단 결정하면 주저 없이 행동에 옮기는 데 있다.
이봉(移封)이 결정된 것은 7월13일, 그런데 20일도 지나지 않은
8월1일 에도(江戶) 입성을 끝마쳤다. 여기에는 히데요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순순히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더구나 신속히 간토로 직행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간토에 들어가자 즉시 직할령을 설정하고 가신에 대한 영지와 녹봉을 할당했다.
원칙적으로 에도 주변은 직할령으로 편입하고 반란의 우려가 없는 후다이 가신들은 원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직할령에는 행정관을 두고 여기에는 다케다, 호조, 이마가와 등 구신을 등용했다.
이에야스가 가장 고심한 것은 간토 전역에 할거하는 소영주와 토호들에 대한 대책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호조와 다케다의 은덕을 입은 자들로 동화시키기가 용이치 않았다.
이에야스는 가이를 점령했을 때처럼 무리한 압박을 극력 피했다.
농촌에 대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서서히 지배력을 침투시켜 가신으로 포섭해 나갔다.
그는 또 토지조사를 단행해 정확한 곡물의 생산량을 산출함으로써
영지의 재정적 기틀을 다지고 부정행위를 방지하는데 힘썼다.
이어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켜 에도를 바다 쪽으로 넓혀 도시의 확장을 꾀했다.
이는 전국의 상인과 기술자들을 끌어들여 상공업의 번영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호조의 연고지인 간토에 옮겨 가게 함으로써,
토호의 반란을 유발시켜 이에야스의 몰락을 기대했다면, 이것은 큰 착각이다.
이에야스는 직할령 설정, 가신의 배치, 토지조사 등을 착착 진행했다.
특히 호조의 가신이던 토호에 대해 종래 신분을 인정해 불만을 제거함으로써
지배체제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 대한 굴복을 이익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간토 경영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 영지가 광대했던 만큼
이에야스의 지위를 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된다.
나중에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가 중앙무대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새로운 영지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제14부 조선침략 전쟁
규슈, 간토, 오우(奧羽) 등을 평정해 천하통일에 성공한 히데요시는
1592년부터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7년에 걸친 이 무모한 전쟁은 문자 그대로 히데요시 정권의 자멸을 초래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믿었다.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여 국내경제를 혼란에 몰아넣고 농민을 도탄에 빠뜨렸다.
모처럼 복종시켰던 다이묘들의 신뢰를 잃었다.
천하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시대가 이미 ‘무인의 계절’에서
‘정치의 계절’로 변했다고 판단하고,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재정과 민정에 밝은 문관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것이 반사적으로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반감은 단순한 감정적인 대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다이묘들의 독립성을 빼앗아 중앙정부의 전제화를 시도하려는 문관파에 대해,
중앙정부에는 복종하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무장파의 반목으로 번졌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자신을 경계하며 반감을 품었던 무장파 장수들과 접촉하며 공공연히 그들을 옹호했다.
무장파들은 조선 출병에 비판적인 이에야스에게 신뢰를 보냈고,
이들이 이에야스에게 사태의 조속한 수습을 당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가운데 대륙침략의 실패로 심신이 피로해진 히데요시가
1598년 8월16일 6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5대 원로에게 맡기고 드디어 눈을 감았다.
그가 죽은 후 정치는 유언에 따라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우키다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등 5대 원로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미쓰나리,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 5명의 행정관이 서정을 집행하고,
그 중간에 3명의 주로(中老)가 양자간의 조종을 맡았다.
이처럼 5명의 원로가 정치의 최고 결정기관이 되었기 때문에 미쓰나리 등이 추진하려던
중앙정부의 전제정치 체제 확립은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더구나 합의제라고는 하나 그중에서도 이에야스의 발언권이 가장 강했다.
그는 최대의 영지와 최강의 군사를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가 그의 기량과 무용을 인정하고 있었다.
5대 원로라고는 해도 이에야스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도시이에뿐이고
그 배후에는 미쓰나리가 있다.
따라서 합의 정치의 내면은 이에야스와 도시이에-미쓰나리의 대립관계였다.
겨우 유지되고 있던 균형상태는 1599년 3월에 이르러 도시이에의 죽음으로 무너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기회를 엿보던 무장파의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이른바 7인방이 미쓰나리를 죽이려 했다.
이에 미쓰나리는 놀랍게도 후시미(伏見)로 도망하여 적대시하고 있던 이에야스에게 보호를 청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佐和山)로 무사히 돌려보냈다.
도시이에가 죽고 그 배후의 실력자 미쓰나리가 실각하자
중앙정부에서 이에야스와 대결할 힘을 가진 자가 사라졌다.
이를 전후하여 도시이에의 뒤를 이어 원로가 된 그의 아들 도시나가가 자기 영지로 돌아가자,
나머지 원로와 유력한 장수들도 각각 영지로 내려갔다.
그들이 돌아간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피폐해진 힘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상하고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또는 이에야스의 정권장악을 암암리에 승인하고 중앙에서 멀어지기 위해… 등등이었다.
제15부 독주체제
이러한 움직임을 본 이에야스는 그해 10월, 후시미 성을 둘째 아들 히데야스(秀康)에게 맡기고,
오사카 성에 들어갔다. 드디어 그는 후시미와 오사카 두 성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조선 출병을 면하여 경제력도 소모시키지 않고 착실히 영지 경영에 진력하여 실력을 축적한 그는
중앙무대를 지키며 천하의 정치를 독점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4대 원로와 미쓰나리가 중앙 정계에서 멀어진 뒤 이에야스는 거의 독재적으로 정무를 처리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관용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가혹한 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히데요시에게 복종한 지 12년 만이었다. 지금이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판단한 이에야스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는 미쓰나리 편이면서도 자기와 은밀히 뜻을 통하고 있던 행정관인 나가모리를 이용했다.
이에야스로부터 정보 제공을 의뢰받은 그는 충성을 나타내려고 도시나가가 모반의 기색을 보인다고 밀고했다.
결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야스가 계속 정보를 재촉하는 바람에 확증도 없이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쾌재를 불렀다. 그로서는 정보의 확실성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도시나가 일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돼, 그의 막료들이 유배를 가거나 감금되었다.
이어서 도시나가와, 그의 편을 들었다는 다다오키에 대해 토벌군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깜짝 놀란 다다오키는 곧 상경하여 서약서를 제출하고 전혀 반의가 없다는 것을 호소하는 한편
도시나가에 대해서도 극구 변명했다.
이에야스는 다다오키의 성의를 무시하면서까지 출병할 수는 없어,
양쪽이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타협했다.
두 사람 모두 싸우지도 않고 이에야스에게 굴복한 결과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토벌의 결심을 밝히고 에도를 출발했다.
동시에 동북 지방에 있던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도 서진(西進)을 명했다.
이에야스의 동군은 10만, 미쓰나리의 서군은 8만 5000.
그러나 여기에 오사카에 있는 서군의 총수 데루모토가 참전하면 피아의 병력은 역전된다.
데루모토가 오지 않는다 해도 성을 공격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보급로가 끊기면 혼성부대이기 때문에 내부 붕괴가 일어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자멸할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적을 성에서 끌어내 야전을 벌이는 단기전(短期戰)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날 밤 이에야스는 전군에 서진을 명했다.
오가키 성을 묵살하고 직접 오사카 성을 공격하려는 것처럼 위장했다.
동시에 사방에 첩자를 보내 적측에 오사카 진격 정보를 흘렸다.
적은 여기에 말려들었다.
미쓰나리는 동군의 전진을 막으려고 성을 나와 나카센도와 호쿠리쿠 가도의
분기점인 세키가하라에 진입했다.
양군의 전투는 9월15일 아침 8시경부터 시작되었다.
동군의 선봉 다다요시, 마사노리 등이 돌격을 개시하고,
서군의 선봉 히데이에가 공격해 나왔다.
약 10일에 걸쳐 난투가 벌어졌다.
오전 11시경에 미쓰나리의 진지에서 봉화가 올랐다.
마쓰오(松尾) 산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난구 산의 히로이에 히데모토 등에게
미리 약속했던 대로 돌격을 명하는 신호였다.
히데아키가 동군의 측면을 공격하고 히로이에 등이 배후를 찌르면
서군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양쪽 모두 전혀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이에야스에게 내응하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오경에 이번에는 이에야스 진영에서 마쓰오 산을 향해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약속대로 속히 내응하라는 독촉의 사격이었다.
히데아키는 그때까지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위협사격에 겁을 먹고 산에서 내려와
기슭에 포진하고 있던 서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데아키의 배신은 전황의 추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드디어 오후 3시경 서군의 완패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미쓰나리는 후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서군의 장수들도 목이 잘리거나 자살했다.
제16부 2元 정치 체제
중앙정권의 주권자로 군림하게 된 이에야스는 1603년 2월 천황으로부터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의 칙명을 받아 군권과 정권을 동시에 장악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바쿠후(幕府)를 개설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바쿠후를 개설한 그는 에도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시가를 확장하고 새로 성을 쌓기 시작했다.
원래 이 공사는 1590년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의해 간토로 이봉되었을 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화로운 성보다는 영지의 기반부터 다져야 한다는,
그의 실리적인 정신에 따라 연기되고 그후 10여 년 동안은 축성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이이다이쇼군이 되자 그 위광을 과시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에도 성 축성은 1604년에 시작되었다. 먼저 석재를 운반하기 위한 배부터 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3000척의 배가 완성되고, 이 배가 100명이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돌을
두 개씩 실어 이즈로 운반했다.
목재도 간토를 비롯하여 스루가, 도토우미, 미카와의 산지에서 벌채했다.
성벽에 바를 석회는 에도 서쪽의 오소키와 나리키 등 두 마을에 명하여
석회암을 태워 만들게 했다.
이에야스는 1605년 4월 세이이다이쇼군 직을 셋째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가 세이이다이쇼군에 재직한 기간은 겨우 2년 4개월이었다.
히데요시라면 어마어마한 지위에 크게 기뻐했겠지만 이에야스는 그렇지 않았다.
명예보다도 실리, 즉 그로서는 도쿠가와 정권의 강화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하부 다이묘들은 에도의 히데타다와 슨푸의 이에야스로부터
2중으로 체크당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경쟁적으로 히데타다에게 충성을 보이려 했다.
다이묘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도로 올라와 처자와 중신들을 인질로 바쳤다.
토목공사의 적극적 참여도 바로 그 엄중한 체크로부터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이에야스는 에도를 마음대로 통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아들의 영지에도
자신의 지시가 반영되도록 자기가 키운 정치가를 투입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이에야스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이 있었다.
즉 승려로는 덴카이(天海), 유학자로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재무관료로는 오쿠보 나가야스(長安), 그리고 차야 시로지로(茶屋四郞次郞)와
영국인인 윌리엄 애덤스 등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이에야스의 측근 그룹으로 활약했다.
이에야스는 경험을 통해 이원정치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1591년에 간파구 직을 조카인 히데쓰구(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다이코(太閤)로 실권을 쥐고 이원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1595년 히데쓰구는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자결을 명령받아 그와
처첩 자식 등 30여 명이 무참히 처형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야스가 쇼군 직에서 물러난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동안 히데요시의 죽음, 세키가하라 전투, 도쿠카와 바쿠후의 성립 등 대사건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 사건의 기억이 이에야스의 머리에서 사라졌을 리 없다.
그가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으면서도 굳이 이원정치를 감행한 것은
절대로 히데요시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부자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원만할 수 없다는 것은
전국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특히 이에야스는 맏아들인 노부히데를 자결시키는 통한을 경험한 사람이다.
이에야스가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한 과정도 독특하다.
본래 후계자로 물망에 오른 것은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 3남인 히데타다,
4남인 다다요시 세 사람이었다.
중신들과 상의한 결과 다다요시는 후보에서 제외되고 남은 두 사람 중에서 택하기로 했다.
히데야스를 지지하는 쪽의 의견은,
그는 무용이 뛰어나고 결단성이 강하므로 쇼군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히데타다를 지지하는 쪽은, ‘지금은 무(武)로써 천하를 위압하기보다는
문(文)을 장려하고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
히데타다 공은 효심이 깊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므로 그가 차기 쇼군으로 적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에야스는 이처럼 두 아들의 성격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결국 히데타다를 후계자로 정했던 것이다.
제15부 히데요시 소탕전
철저한 지배와 통치를 지향하는 이에야스에게 가장 큰 장애는 65만 석의 큰 영지를 가지고
나라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는 히데요리였다. 그는 히데요시의 아들이다.
도요토미히데요시 가문은 사실상 지방의 한 다이묘로 전락했으나 영향력은 상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기요마사, 마사노리 등 앞서 히데요시에게 직속되었던 무장들은
슨푸나 에도로 올 때마다 은밀히 오사카에 들러 히데요리에게 인사하기를 잊지 않았다.
세키가하라 패전 이후 실직한 무사들을 도요토미 가문이 암암리에 도와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패전으로 실직한 무사는 전국에 걸쳐 수십 만, 대부분은 취업의 길이 막혀 있으므로
다시 난세가 오기를 바라는 반사회적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전국의 실직 무사를 위시하여 현상에 불만은 품은 자들은
심리적으로 도요토미 가문 쪽으로 기울어졌다.
만약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동정적인 세력과 반항세력이 하나가 되어 폭발한다면,
창설기에 있는 이에야스 정권은 토대가 흔들려 붕괴할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정권의 영구화를 꾀하는 이에야스로서는 반란의 진원지를 그냥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서서히, 그러나 착실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무려 14년이나 기다리다가 오사카 쪽에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야스의 압박작전은 1605년 쇼군 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을 때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때 그는 히데요리에게, 상경하여 새로운 쇼군에게 복종하는 예를 드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오사카 쪽이 거부하자 일단 후퇴했다가 2년 후 슨푸 성 수축공사 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인근의 다이묘들과 똑같이 그에게도 부역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바쿠후의 통치권이 전국에 골고루 미치고 있으므로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오사카 쪽에서는 크게 노하여 5대 원로의 하나인 도시나가에게 부역의 철회를 주선하도록 의뢰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은퇴했다. 결국 도요토미 가문은 이에야스의 요구에 응하고 말았다.
이에야스의 끈질긴 압박작전은 그 뒤에도 계속됐다.
1611년 3월, 고미즈노오(後水尾) 천황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를 니조(二條) 성으로 불렀다.
이때도 오사카 쪽에서는 분개하며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기요마사, 요시나가 등이 중간에 나서
‘거듭되는 항명은 이에야스에게 처벌의 구실을 준다’고 충고해 겨우 히데요리의 상경이 이루어졌다.
제16부 이에야스에게 속은 요도 부인
한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가문의 재정을 고갈시키는 작전을 폈다.
당시 오사카 성에는 막대한 양의 금괴와 금화가 비축되어 있었다.
난공불락의 성이라 일컫는 오사카 성이 그 엄청난 금을 가지고 저항한다면,
이쪽의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에게
권하여 각지의 사찰을 재건 수축하여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라고 설득했다.
그 제의에는 지금까지 무슨 일에나 반대하던 히데요시의 요도 부인도 선뜻 응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다기보다는 미신에 빠져 있었다. 이리하여 오사카 쪽에서는
세쓰(攝津)의 덴노(天王) 사를 비롯하여 무려 20개가 넘는 사찰과 신사에 시주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요토미 가문은 호코(方廣) 사에 거대한 대불(大佛)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대불 건조는 돌아가신 히데요시 전하의 숙원입니다. 반드시 이룩하십시오.
나도 미흡하나마 협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고 히데요리 모자를 격려한 것은 이에야스였다.
대불의 건조는 1602년부터 착수하여 10년 후인 1612년에 끝났다.
그동안 오사카 성의 금은은 고갈되어, 친동생인 히데타다 부인에게 협조를 부탁하게 되었다.
호코 사의 대불전과 대불 및 범종의 낙성식은 1614년 8월에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행사를 며칠 앞두고 별안간 에도에서 낙성식 연기 명령이 내려왔다.
용마루에 도편수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고 종명(鐘銘)에 새겨진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는 넉 자가 무엄하다는 이유였다.
이에야스의 의도를 간파한 측근의 학자 그룹 중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왜곡하여 해석하는 자가 있었다.
“국가안강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둘로 갈라놓은 것으로 무서운 악의가 숨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한 이는 다름 아닌 하야시 라산, 수덴(崇傳) 등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이에야스는 크게 노하여, 사자를 오사카로 보내 힐문했다.
그리고 수습책으로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에도로 옮겨올 것, 오사카 성을 비우고 영지를
교체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것은 최후통첩이었다.
오사카 쪽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조건의 수락은
곧 자기 가문의 멸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강경하게 맞섰다. 이에 히데요리 측은
자기 가문의 최고 원로로 그 동안 바쿠후와의 관계를 조율하고 있던
가타기리 가쓰모도(片桐且元)를 살해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알아차리고 성에서 탈출했다.
그러자 히데요리는 그의 영지를 빼앗고 이 사실을 에도와 슨푸에 통고했다.
이것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오사카 쪽에 가담한 것은 통제의 강화와 궁지에 몰린 실직 무사들뿐이었다.
따라서 서군의 병력은 총 10만이라고 하지만 히데요리 직속의 가신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중에 불과했다.
1614년 10월, 히데요리가 군사를 출동시켰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 이에야스는 마침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벌떡 일어나, “오사카 토벌은 나의 숙원이었다!”고 외치며 칼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의 군사는 모두 20만. 그들은 일제히 오사카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마사나리, 나가마사 등 히데요시 가문 출신 장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여전히 신중한 이에야스였다.
직접적인 전투는 11월19일에 시작되어 약 1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주위 수십 리에 걸쳐 방대한 해자를 둘러친 이 천하 제일의 오사카 성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초조감을 느낀 동군 일부는 성곽 밖의 작은 성을 공격했지만
수많은 병사가 해자에 빠지는 등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젊은 히데타다는 억지로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에야스는 그를 제지했다.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 준공 때 의기양양하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이 성을 함락할 수 있는 방법은 장기적인 포위전 외에 외곽의 해자를 메우는 일밖에는 없다”
이에야스의 뇌리에 문득 떠오른 것은 그 말이었다.
‘그렇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서 싸우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는 곧 화평 교섭을 시작했다. 적의 급소는 요도 부인과 하루나가였다.
화평 공작은 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기세가 등등하던 요도 부인도 네덜란드제 대포로 덴슈가쿠를 공격당해
시녀 몇 명을 잃은 뒤부터는 갑자가 사기가 떨어져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이에야스는 탐지했다.
마침 성안에는 요도 부인의 동생으로 미망인이 된 조코인(常高院)이 있고
동군에는 그녀의 아들 교코쿠 다다타카(京極忠高)가 있었다.
이에 조코인을 다다타카의 진지로 불러내고
이에야스 쪽에서는 혼다 마사스미를 딸려 교섭에 임하게 했다.
이리하여 오사카 성은 본성만 남기고 모두 철거한다,
하루나가 쪽에서 에도에 인질을 보낸다는 조건하에 앞서의 요구사항을 모두 철회하고 강화를 성립시켰다.
그런데 이 밖에 명문화하지 않은 희망 조항이 있었다.
그것은 도요토미히데요시 쪽과 강화 교섭에 나섰던 마사스미가,
“화해 기념으로 하다못해 성 외곽의 해자라도 제거하고 싶다”고 제안한 일이었다.
도요토미 쪽에서는 그 정도의 일이라면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한 나머지 승락하고 말았다.
해자 제거작업은 12월 21일부터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동원된 인부는 수만에 이르는 다이묘들의 병사였다.
성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대번에 인부로 변했다.
순식간에 셋째 성의 해자가 메워지고, 내친 김에 둘째 성과 본성의 해자까지 메우고 말았다.
이것은 공사의 착오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지시가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현장의 총감독은 마사스미, 그 뒤에는 이에야스가 있었다.
히데요시 쪽은 나중에야 이 사실을 거세게 항의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마사즈미는 “현장의 인부들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계속 사과만 할 뿐이었다.
하루나가는 마사스미를 상대해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교토로 올라가 이에야스에게 면담을 청했다.
이에야스 곁에는 마사스미의 아버지 마사노부가 있었다. 그는 하루나가의 항의를 받고,
“아들 녀석이 어이없는 실수를 했군요. 반드시 할복을 명하는 것으로 사과를 드리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해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히데요시 쪽에서는 이때서야 비로소 이에야스의 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듬해 4월, 이에야스는 서둘러 전쟁준비를 시작한 히데요시 쪽을 비난하면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 성을 공격했다. 이때 서군은 10여 만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겨울과는 완전히 양상이 달랐다.
주위에 해자가 없는 성은 민가와 다를 바 없었다.
서군은 농성도 할 수 없게 되어 전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나왔다.
이에야스가 뜻했던 대로 그들을 야전에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서군은 지휘계통도 확립되지 않은 혼성부대였다.
드디어 열흘 만에 서군은 2만의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5월8일 아침이었다.
히데요리와 요도 부인은 불탄 덴슈카쿠 밑에 숨었다가 자결하고,
오노 하루나가는 전사했다.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막을 내렸다.
제17부 이에야스의 유훈
그리고 인내와 집념으로 명실상부하게 천하의 패권을 장악한 이에야스도
그 이듬해인 1616년 4월17일 슨푸에서 75세의 삶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글과 유훈 중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고행길과 같다.
쉽고 게으른 방법으로서는 짐을 옮길 수가 없다.
오르막길의 어려운 역경에도 순응해야 하며 내리막길에는 조심해야 한다.
무슨 일이건 사람들은 쉽게 양보하지 않으므로 사람에게 굳이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람을 둘러싼 환경은 수시로 바뀌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수가 없다.
양보를 받지 않아도 기다리다 보면 환경과 상황이 변해 저절로 이루어 질수가 있다.
각자의 인생과 운명 앞길에는 알수없는 수많은 변화가 닥친다.
순간적인 변화에 일일이 경솔히 대응하면 중심 못 잡고 휩쓸려 가고 만다..
나쁜 운명은 계속되는 나쁜 운명에 상쇄되기도 하고 스스로 에너지를 잃기도 한다.
忍者는 엄청난 참을성으로 좋은 챤스가 오는 미래를 기다릴 뿐이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마음에 화가 생기거든 참고 기다렸던 아까운 시간들을 생각하라.
분노는 곧 자기노출이므로 적들이 좋아한다는 점을 생각하라.
패배를 모르면 승리를 알 수가 없으므로 패배는 곧 승리의 탐색전과 같다.
배고프면 무엇이든 맛있듯이 인내와 기다림의 끝은 달콤하다.
그렇다고 잔꾀를 부리고 아무것이나 집어 먹으면 식중독에 걸린다.
인내심이란 자신을 탓하며, 앞으로 있을 챤스를 향해 내공을 쌓는 것이다.
챤스는 남의 탓이 아니며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챤스는 인내심으로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